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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철학

김충렬 박사의 ‘살자’ (8) - 개인 자유와 동시에 책임도 강조

중세시대 수도원서도 있었던 자살, ‘이성’ 계몽주의 땐?

김충렬 박사의 ‘살자’ (8) - 개인 자유와 동시에 책임도 강조 [2009-03-03 06:47]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1.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유형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6. 자살의 역사적 이해-(3) 르네상스 시대
7. 자살의 역사적 이해-(4) 종교개혁 시대
8. 자살의 역사적 이해-(5) 계몽주의 시대

계몽주의는 이성(理性)의 기능을 우선시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한 운동이다. 계몽주의에서 인간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성은 인간을 인간되게 만드는 위대한 특성이다. 이성은 자율적으로 기능하며, 그 기능에 따라 인격성숙을 가능하게 만드는 주체로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되게 만드는 뚜렷한 특성이다. 그런 이유로 이성의 특성은 더욱 합리주의를 발달시켜 신학에서도 신화나 신비주의를 미신적인 것으로 보기에 이른다.

이런 계몽주의의 이성은 이미 합리주의가 대두될 때 그 조짐이 싹트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계시에 대해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은 합리성에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그에 합당한 사고를 할 때 참다운 인간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에는 자살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졌을까? 우리는 이를 다음의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신을 파괴할 자유는 없다

계몽이란 잠든 이성을 깨워서 인간의 주체로 삼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은 자연히 인간의 성숙과 미성숙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칸트(Immanuel Kant)는 처음 이 계몽이란 용어에 대해 ‘인간이 미성숙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미성숙은 인간이 성숙해야 할 책임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성이 올바로 기능하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이었다. 정신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성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미성숙한 존재가 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가진 이성을 깨우쳐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성숙한 존재가 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자율과 성숙을 선물로 주기에 미성숙 상태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이성을 구사하려는 자신의 결단과 용기의 결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몽, 즉 잠든 이성을 깨우려는 계몽주의의 시대적 경향은 철학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모두 17세기 영국의 홉스(Hobbes)와 흄(Hume)와 18세기 독일의 레싱(Lessing)과 칸트(Kant), 프랑스의 루소(Rousseau)와 볼테르(Voltaire) 같은 사상가들이다.

이런 계몽주의 시대에서도 자살에 대해서는 일단 존 로크(John Locke)가 주장한 관점이 팽배했다. 로크는 신(神)이 개인에게 자유를 줬지만, 그 자유에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자유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견해는 자신을 보존할 책임과 하나님의 의무를 어길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입장들은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계몽주의에서도 상당 기간 동안 자살을 이해하는 시금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것이 계몽주의에서 이성의 기능이 부각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면서 점차 이런 분위기가 약화되고 있었다.

2) 자살은 자연법 위배 아니다

계몽주의 초기를 대표하는 로크의 견해는 모두 일정한 기준과 특정한 관점에서 자살을 단죄하는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대립적인 입장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에 이른다.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되는 가운데 자살을 파악하려는 관점이다. 그것은 계몽주의가 자살을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그 선봉에 선다.

흄은 그의 미발표 저서인 <자살에 관하여(On Suicide)>에서 아퀴나스의 자연법에 의한 자살의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계몽주의적인 접근에 힘을 실었다. 아퀴나스의 견해에 대해 흄은 “자살을 공격하기 위해 자연법을 논리에 어긋나게 자의적으로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기준이 모호하다. ‘하나님의 질서’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그 법을 어기는 것이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질병이나 재난에 순응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강물의 흐름을 바꿔놓는 것을 허용하듯, 어떤 경우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을 허용하고 어떤 경우엔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명백한 잘못”이라고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잣대는 없다.

둘째, 일부 자살은 그 질서에 순응될 수 있다. ‘하나님의 질서’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우리가 이성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라면, 일부 자살은 오히려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즉, 여러 여건을 고려해 자살하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이성적으로 판단된다면 자살하는 것이 곧 질서를 따르는 것이 된다.

셋째, 자살은 하나님의 동의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질서’가 단지 하나님이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동의할 것이다.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매 순간 관여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동의하고 안 하고의 구분이 사실상 없어지게 된다. 이런 시각은 아퀴나스의 관점과 비교된다. 그에게 있어 자살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만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며, 인간이 언제 죽을지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자신에 대한 의무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흄은 ‘자살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질병과 노화, 불행 등은 인간의 삶을 충분히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럴 땐 사는 것이 때로 죽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의 자살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흄은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이나 비난받는 데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다섯째, 자살은 타인에 대한 의무를 어기는 것도 아니다. 흄은 자살이 타인에 대한 의무를 어기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흄에 의하면 사회와 개인은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다. 그러나 타인에게 심각한 해나 고통을 주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면, 그런 상호관계는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우리가 타인에게 실질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경우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자살은 단지 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상에서 기술한 흄의 견해는 지금까지의 자살에 대한 관점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견해는 자살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태도가 매우 혼란스럽고 미신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태도는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전제하는 공리주의적인 측면에 바탕하고 있다. 공리주의는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두는 사상이다. 이는 계몽주의가 인격 성숙을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돼 판단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경향에서 볼 수 있다.

3)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

계몽주의는 이제 자살을 이성의 기능 중심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는 자살을 이성이라는 기능을 활용해 자연법이 아닌 과학적으로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성(理性)이 눈을 뜨면서 학문을 수립하는 시기인 계몽주의 때에야 비로소 자살을 이성의 눈, 즉 과학의 눈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은 판단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에 이성의 기능 강화는 개인의 책임 중시로 이어지는 분위기에서 자살은 전체적인 측면보다 개인의 상황이나 여건이 고려되기 시작한다. 이때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보다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를 파악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신학에서 자살을 “악마와 죄인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개인적인 일로 보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일이란 개인 심리의 결과나 특정한 사회적 상황도 포함하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자살을 개인적으로 파악한다는 말은 인간이 갖는 자율성에서 이해된다. 이성의 자율성은 계몽주의의 기본적 원리다. 자율성(autonomity)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법(法)이 된다는 것이다. 그 법은 물론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참된 존재로서 우리 안에 있다. 자율성을 처음 언급했던 칸트는 이를 말하고자 했다. 즉, 자율성은 법이 결여된 주관성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본질적 속성이기에 이러한 이성의 법으로부터 이탈하는 모든 것은 의지(意志)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율성은 타율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 둘을 비교해 보면 더 잘 이해된다. 타율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낯선 바깥의 것, 낯선 권위에 의해 지배받고 조정된다. 인간은 욕망이나 충동, 그리고 쾌락 원리 등에 자신을 내맡길 때 이미 타율적이 된다. 이때의 타율성은 순수한 이성 법칙에 의해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두려움, 낯선 권위의 안전성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즉 이성의 용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전을 보장하는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시도다.

이런 점에서 타율성은 이성적 의지와는 다르게 간접적으로 쾌락 원리에 호소하는 것이 된다. 이성의 구조와 법칙을 부정하고 내적인 충동이나 외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런 타율성에는 어떤 정치, 종교, 교육적 권위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율적이 되기 위해 이런 타율 안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해 자기 경험으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따라서 자율성은 비록 타율성 안에서라도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적 조화를 산출해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지 못하는 한 타율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에서 이성의 자율성으로 자살을 이해하면서, 비교적 자살에 대해서는 문(門)이 열리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돼 그 책임성이 부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면 계몽주의는 이성의 기능이 중심이었지만, 실상 이것은 자연법에 대한 해석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자살이 자연법에서만, 그리고 신학적인 관점에서만 이해되던 것이 개인의 여건과 심리, 그리고 사회적인 상황의 결과들까지 고려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살은 1763년에서야 처음으로 체계적인 이해가 시작됐고, 자살 행위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의미부여도 18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고 알려진다. 자살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 데는 계몽주의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이다.

4) 자살에 대한 허용적 입장만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계몽주의가 전반적으로 자살에 대해 상당히 허용적인 입장을 취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칸트는 자살에 대해 가장 반대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 중 하나다. 칸트는 개인의 자율적인 이성적 의지에서 도덕적 가치가 나온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개인의 이성적 의지는 도덕적 의무의 원천이기에 그 이성이 자신을 파괴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살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인간성을 실추시키는 행위요 도덕적 권위의 근원을 공격하는 모순이라고 파악했다. 이런 반대에도 자살은 계몽주의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문제일 뿐 아니라 점차로 허용되어지는 분위기로 가고 있었다.

계몽주의의 자살에 대한 관점은 그동안 자유롭지 못하던 자살 논의가 비교적 확대된 점이 특이하다. 그 발단은 이성의 기능이 새롭게 발견된 결과다. 인간의 정신이 중심이 되는 이성을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을 시사한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에서 이성의 기능이 잘못되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건강하지 못하면 곧바로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져 자살을 유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계몽주의의 이성이 자율성과 함께 그 책임성을 부과하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계몽주의는 개인 이성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측면만 아니라, 이를 올바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오늘의 자살에서 개인의 이성적 기능과 더불어 그 책임성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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