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 종교개혁시대, 자살을 어떻게 봤을까
김충렬 박사의 ‘살자’ (7) - ‘자살의 예외’ 논의되기 시작하다 [2009-02-23 06:10]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6. 자살의 역사적 이해-(3) 르네상스 시대
7. 자살의 역사적 이해-(4)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시대는 역사적으로 보면 르네상스 시대와 중첩된다. 르네상스 시대는 16세기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중세적인 봉건제를 버리고 근세적인 중앙집권화가 진행됐고, 문예사조로는 르네상스에 해당돼 휴머니즘이 주창됐다. 이 시대의 ‘휴머니즘’은 이교적인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을 따르고, 인간적 가치의 앙양을 목표로 해 기독교와 모순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인문주의자들의 목표는 ‘크리스천 휴머니즘’의 확립이었다. 종교개혁은 사실상 이런 르네상스 시대 휴머니즘의 바탕에서 일어났다고 이해해야 한다.
1) 자살은 개인의 문제
종교개혁 시대는 인문주의 후기와 중첩되고 있다고 했다. 중세 신 중심의 신앙적인 압박에서 벗어나 인간성이 중요시되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理性)이 중요하게 작용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 존엄성이 서서히 기치를 들기 시작한 시대다. 자살도 사회에서 허용하거나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자살을 개인적으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앞장선 것은 전술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몽테뉴(Michel Eyguem de Montaigne)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Utopia)>에서 자살을 고통이나 치료될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허용하듯이 표현한 것이나, 몽테뉴가 <수상록(Essias)>에서 자살 사례와 자살을 칭송한 로마 작가들의 글을 인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몽테뉴는 특히 “삶은 타인들의 의지에 달려있으나 죽음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의도는 자살을 전체적인 것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는 철학이나 학문, 그리고 신앙의 영역이 함께 다뤄지는 분위기에서 자살이 다르게 이해되는 단면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다 스펜서는 <요정여왕>을 통해 플라톤적인 연애사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문주의, 거기에 청교도주의까지 섞어 그것들이 서로 모순됨에도 관능적인 회화미와 밝은 음악미를 구현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문예를 대표하는 것이 운문극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종교극에서 출발한 영국 연극은 서서히 세속화의 길을 걷다가, 16세기 중반 사회적·사상적으로 진폭이 커진 엘리자베스 시대가 되자 국민들의 연극에 대한 정열이 폭발해 급속한 발전을 이룬다. 인간의 중심이 되는 이성의 작용을 통해 인간의 욕망에 자유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을 그림으로 그렸고 그것을 다시 연극으로 표현하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지옥에 떨어지는 듯한’ 무서움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자살은 중대한 죄악
종교개혁은 기존 종교세력의 타락에 눈을 뜬 새로운 신앙적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비판의식에서 비롯됐다. 교황의 과세와 교직 임명에 대한 간섭은 백성들의 생활에 압박감을 줬다. 교황청의 행정도 부패했다. 여기에 수도원들이 소유한 많은 토지는 귀족들이나 농민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다. 농민들은 지방 교직의 착취로 경제적 불안 상태에 있는데다가 불같이 일어나는 독일 휴머니즘의 지성적 발전과 일반적 종교각성은 백성들에게 깊은 공포심과 구원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가 슬로건이 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신의 주권이 강조되고 신의 섭리와 삼위일체론이 중요시됐다. 마틴 루터가 외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죄로 물든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는 칭의론이나 칼빈의 예정론이 새롭게 부각됐다. 오직 절대적인 신의 주권만이 강조되던 이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순종하는 길만이 중요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자살은 제6계명을 어기는 행위라는 사실에 기초할 수 밖에 없었다. 생명을 파괴시키는 자살행위는 중대한 죄악이었다. 타인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위이든 자기 자신의 그것이든 하나님의 형상에 중대한 손상을 가하는 행위로 봤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생명의 절대적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기에 자살은 하나님의 소유물(시 24:1)을 자의로 탈취하는 행동이라는 관점이었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신 32:39, 삼상 2:6).
신의 주권이 강조된 종교개혁 시기에는 자살이 엄격하게 금지됐다. 교회와 사법기관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살 행위에 대항하는 싸움을 계속했다. 17세기 교회와 자살과의 싸움은 “자살하는 자는 품위 없는 평민”이라는 루이 14세의 선언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자살한 사람의 손가락을 직접 모두 잘라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집을 파괴하고 집을 둘러싼 숲의 나무들도 모두 베어버리도록 명령했다. 자살한 귀족의 문장은 교회 대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깨진다. 자살한 사람이 부르주아이거나 대표자였다면 그의 사체를 목 매달아 걸어두고, 재산은 모두 몰수해 왕에게 바쳐진다. 자살 미수의 경우 그 사람은 지하 독방에 갇히거나 광장에서 곤장을 맞아야 했다.
3) 자살은 회개할 수 없는 죄
종교개혁이 믿음의 시기로 상징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 시대 자살이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관점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이 함부로 파괴할 수 없다는 중세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칼빈(Calvin)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보다 엄격하게 자살을 금지했다. 자살은 긍휼이 여김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회개도 불가능하다는 식이었다.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이 자살행위를 가차없이 비난하는 이유였다.
다만 자살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마틴 루터(M. Luther)가 비교적 틈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루터는 “자살한 자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함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루터가 “자살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성령훼방죄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해 더 많은 교인들을 자살로 유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시대 자살에 대한 분위기는 비단 독일어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신앙이 돈독한 청교도들이 그랬다. 당시 영국 개신교도들은 자살의 도덕성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러한 관점은 17세기 후반까지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존 로크(John Locke)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타고난 개인의 자유를 줬지만 그 자유에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자유를 주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아퀴나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런 분위기는 종교개혁자들이 자살에 대해 관심을 크게 갖고 토론하거나 역설한 것은 아님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종교개혁자들은 생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종교개혁에 나서느라 자살에 대해 그다지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생명 중시 차원에서 자살을 허용하지 않고 있음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가운데서도 종교개혁자들은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가톨릭의 견해와 달리 부분적이기는 해도 하나님이 자살을 긍휼히 여기고 회개를 허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4) 자살의 예외적인 경우
종교개혁 시대에는 물론 교회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입장도 있었다. 16세기의 믿음과는 거리를 둔 철학이 부활했고, 과학과 문학이 재개하자 자기 변호를 하는 데까지 나간 몇몇 작가들이 자살을 정당화하고 교회에 저항하려는 태도를 표방했다. 자살을 옹호하려는 반응이 출발한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다. 로마법 연구, 고대 문화의 찬양, 모방 및 재현 욕구가 이런 반응을 양산했다. 이런 사실은 자살이 다시 빈번하게 일어났음을 추론하게 한다. 메디치 공작에 의해 독살된 필립 스트라치와 같은 당대 유명한 명사들도 자살을 선호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자살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일관성있게 거부됐으나, 루터나 퍼킨스 등은 자살이 구원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에 해당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고 했다. 아메시우스(1576-1633)는 자살을 극히 심각한 죄로 규정한 후 정의의 명령에 따라 자살하는 경우, 예컨대 국가기관이 형벌로서 자살을 명령하거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을 주는 경우에는 자살이 정당화된다고 봤다. 이처럼 자살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의해 고통받는 경우로 간주됐다. 삼손의 행동은 이런 관점에서 정당화됐다. 또 해전을 벌일 때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배에 불을 질러 적함에 돌진하는 행위는 죽음이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뤄진 삼손의 행동을 일반화된 모범으로 제시할 수 없으며, 적에게 상해를 입힌다는 목적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는 우리 생각과는 달리 완전히 신앙적으로만 채색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인문주의의 발흥과 신앙의 중심이 어느 정도 혼재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개혁 사상가들에게는 신앙이 중요시됐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문주의, 즉 휴머니즘이 더 중요했다. 이는 중세 가톨릭 신학의 반대만이 아닌, 독일과 스위스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와 도시 사회의 등장, 일반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각성과 새로운 경건주의의 수용, 그리고 당시 유럽인들의 신앙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개인주의 사고와 내면적 진리의 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루터에게 믿음이란 “어떤 사실에 대한 정보나 지식, 확실성보다는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절대적 선(善)에 기쁨으로 굴복해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후에 루터는 신앙을 강조하고 칼빈은 <기독교강요> 등으로 신학이 체계화된 결과를 산출하게 됐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자살은 신의 절대 권위를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됐고, 용납될 수 없었다.
확실히 종교개혁은 인간의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신에 대한 심오한 신비적 실체감을 깨우쳤다.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린 기독교인들에게 그 절대적 존재를 믿게 만들었고, 암흑 속에서도 절대적 존재에 신뢰를 갖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앙을 일깨웠다. 그러나 근본적인 인간 존엄성의 문제는 신의 절대성에 가리워 버리지는 않았는지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생각해 할 일이다.
이런 종교개혁의 특징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자살은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린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기독교인이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린 상태는 그대로 정신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우울증 상태로 이어진다.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의 자살이 우울증과 관련해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한국상담치료연구소: 02-2202-3193, www.kocpt.com
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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