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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철학

김충렬 박사의 ‘살자’ (10)- ‘자살=지옥’보다 예방대책이 우선


장자연, 이창용… 자살릴레이, 막을 수 없는가

김충렬 박사의 ‘살자’ (10)- ‘자살=지옥’보다 예방대책이 우선 [2009-03-16 07:13]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1.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유형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6. 자살의 역사적 이해-(3) 르네상스 시대
7. 자살의 역사적 이해-(4) 종교개혁 시대
8. 자살의 역사적 이해-(5) 계몽주의 시대
9. 자살의 역사적 이해-(6) 낭만주의 시대
10. 자살의 역사적 이해-(7) 19-20세기

자살예방을 위해 역사적 고찰을 실시하는 와중에도 두 유명 연예인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故 장자연 씨의 유서 공개로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지만, 결코 이것이 자살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될 것이다. 경기침체로 인한 실직의 공포는 다가온 봄과 함께 20-30대 자살율 증가의 우려를 낳고 있다. ‘자살의 역사적 이해’ 7번째 마지막 편은 모더니즘 이후의 자살에 대한 다양한 사상을 고찰해 본다.

19-20세기는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된다. 이 시대는 일관되게 사회 상황에 영향을 끼치던 이전의 사상과는 달리 다양한 사상이 복합적·혼합적으로 지배했다. 이 시대는 존재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가 등장하고, ‘있는 그대로’를 중요시하는 사실주의, 복합성을 표현하는 양식의 상징주의, 그리고 모더니즘 등이 다양하게 작용했다. 이런 시대적 다양성은 자살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이 제기되는 양상을 도출하게 했다. 자살 논의는 이미 계몽주의 때부터 어느 정도 문이 열리면서 낭만주의에 이르러는 반드시 죄가 아니라는 관점으로까지 논의되다 이제는 자살의 이유와 동기에 대해 상당히 다양한 관점이 제기된다. 이런 자살은 시대적 사상과 관련,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쇼펜하우어: 맹목적인 삶을 의지로 이겨내야
자살은 맹목적 의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이고 굴복일 뿐

 
삶의 허탈은 자살을 유발할 수 있다. 삶의 허탈은 인간이 갑자기 힘을 잃는 심리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실존의 확신을 상실하게 돼 삶을 포기할 정도에 이른다. 이때 자살은 하나의 해결책으로 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이미 문학의 낭만주의에서 시작, 실패한 사랑을 자살로 종결하는 것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자살은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인생은 별다른 내용이 없는 허탈한 것으로 보는 염세주의적 관점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주의에 기초한 측면이 있다.

사실주의는 일부러 미적(美的)이고 조화된 것을 찾기보다 추악하고 불쾌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며, 관념적인 유형보다 구체적인 개성을 중시하고, 이상주의처럼 선택적·수식적이 아닌 사실적·객관적인 묘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때로 사실주의는 일면 낭만주의 시대와 중첩되지만, 낭만주의의 시대적 조건과 달리 사회적 현실의 문제가 사람들의 보편적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전개된 자본의 지배가 좀더 철저하고 현저하게 된 현실에서 사회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에 대한 인식이 싹트게 됐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삶의 의지력이 결핍된 현상에 주목했다. 인간의 삶은 허탈한 의지로 인해 끊임없는 욕구가 이어지면서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런 사상은 여러 젊은이들을 자살에 이르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의 사상은 상당히 오해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는 자살을 권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맹목적인 삶을 의지로 이겨야 된다고 설파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욕구나 무의지가 부정되고 항상 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의지를 세워 맹목성을 극복하는 것이 삶의 과제라는 ‘의지의 초상’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해탈과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쇼펜하우어는 자살자가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살은 맹목적 의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굴복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2) 까뮈: 삶의 부조리에 맞서 싸워라
자살은 삶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포용하는 책임을 포기하는 것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자살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자살은 생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자살은 부조리한 인간의 삶에 직면해 인간의 의지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자살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살은 무의미한 삶에서 자신을 의미의 근원으로 깨달으면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실존철학자들이 사르트르와 동일한 입장은 아니다. 이는 실존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존재 양식에서 항상 특수하고 개별적이다.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며, 인간은 이 가능성을 선택해야 한다. 인간과 다른 사물 및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구성되기에 실존은 항상 세계 내의 존재로서 가능성이 중요시된다. 이때 인간을 절대적이거나 무한한 실체의 현현(顯現)으로 보는 견해와 대립하며 의식·정신·이성·이데아 등을 강조하는 관념론 등의 형태에 반대한다. 이런 점에서 실존(existence)은 존재(being)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이 초월성이 실존의 기초로써 유신론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인간 실존은 절대적 자유로서 자신을 투여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실존주의는 급진적 무신론의 형태를 띨 수도 있으며 인간 실존의 유한성, 즉 투여와 선택의 가능성에 내재한 한계를 강조함으로써 휴머니즘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런 점은 실존주의가 역설적으로 삶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실존 철학자들에게 삶은 언제나 중요한 근간이었다.

실존주의는 겉으로 삶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적했지만 실제로는 그 부조리와 모순에 대항해 살 것을 권유한다. 여기에 까뮈(Albert Camus)를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까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다룬다.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진 코카서스 바위를 다시 굴려 산 위에 오르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삶의 부조리로 설명한다. 그래도 그 부조리에 맞서 용감하게 싸울 것을 강조했다. 이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까뮈는 자살이 삶의 부조리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자유를 가져다 줄 것처럼 유혹하지만, 자살은 삶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포용하는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정신의학자들: 자살은 특정한 질병과 관련
카톨릭은 20세기 들어 자살자 장례 허용

정신의학자들은 자살이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같은 질병과 관련됨을 인식하고 치료를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자살에 대한 다양한 학술적 이론은 19세기 이후 많이 나오고 있다. 19세기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들의 이론은 자살자들을 심신상실자로 보는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실제로 우울증은 여러 정신질병 중에서 자살률을 가장 높게 점유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95% 이상이 당시에 심리 및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지만 그 중에서도 우울증이 80%를 점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울증(depression)은 의기상실한 기분과 정신운동 저하의 정신적 증후군이다. 우울증은 울증 또는 울병이라고도 하며 대개 심리적으로는 ‘희망 없음’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신체적으로는 불면증이나 체중 감소수반한다. 우울 상태는 프로이트(S. Freud)에 따르면 개인의 분노가 내면으로 향한 형태이며, 칼 융(C.G. Jung)에 의하면 정신에너지의 고갈을 의미한다. 이때 융의 정의는 우울증 이해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융은 우울증이 의식에서 이용할 만한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고 했다. 에너지는 무의식에 정체되고, 지금까지 돌보지 않은 내면세계가 큰 세력을 가지고 의식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자살자가 느끼는 절망감, 허무감, 자살관념 등은 자아의식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자아가 집착해 온 사회적 평가, 객관적 기준, 사회 규범의 한계를 느끼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다.

자살과 정신질병의 원인론적 분위기는 교회에도 반영되어 카톨릭에서는 1917년 제정된 종교법에서 자살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개정하기에 이른다. 의사의 증명서를 통해 정신착란이나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죽음이 일어났다는 것만 증명하면 모든 종교적인 장례식이 허용됐다. 이는 자살한 사람도 교회의 심판없이 자유롭게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종교법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자살한 사람들에게는 교회장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완전히 새롭게 고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자살은 더 이상 교회에서 범죄가 아닌 일종의 정신병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4) 뒤르켐: 자살은 현대화 과정서 나타나는 사회적 질병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사회의 병리적 현상 중 하나

 
사회학적인 관점은 자살을 사회현상의 하나로 간주된다. 사회학자들의 자살 연구는 사회적 상황과도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개인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집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인이라는 데 초점을 둔다. 자살 요인들 가운데 사회학자들의 관심은 단지 전체 사회의 수준에서 감지되는 자살자의 행위와 관련되는 점이 일차적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인에 대해 에밀 뒤르켐(E. Durkheim)은 그 선두에 선다.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가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타나는 소외나 혼돈 상태의 아노미 현상 등 사회적 질병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사회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된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상실된 혼돈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뒤르켐이 자살을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뒤르켐의 자살이론은 두 개의 사회적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 통합(integar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조정(regulation)이다. 이런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자살의 요인은 단지 전체 사회의 수준에서 감지되는 자살자의 행위와 관련되는 점이 일차적이다. 여기에 사회적 측면에서자살의 특성에 따라 유형화를 시도하는데,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죽는 이기적 자살, 타인을 위해서 죽는 이타적 자살, 사회가 무질서 하게 되어 붕괴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아노미성 그리고 절망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운명론적 자살 등으로 구분한다.

사회학적 관점의 자살에서 보면 최근에 일어나는 기독교인의 자살은 운명론적 자살에 가까운 것이다. 운명론적 자살은 자기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일어난다. 이 상황에서 신앙은 상당히 무력화된 상태임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운명론적 자살은 힘들고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도저히 견뎌내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자살로 그 분출구를 찾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5) 자살은 죄가 아니라 ‘불행한 사건’
자살자 장례문제 논쟁 종식돼야 할 때

‘자살=죄’는 명제는 오래도록 기독교의 보루 역할을 해 왔다. 이제 이런 정죄의 소극적인 방법이 수정돼야 할 때가 됐다. 이런 신앙적 명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자살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유일한 방어벽의 실효성이 약화되었거나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사전에 교육하고 예방하는데 더 노력하는 등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리고 자살자 장례에 대해 개선을 지향할 때도 됐다. 실제로 카톨릭은 이미 전향된 자세를 보인지 오래다. 1965년 바티칸 제2공의회의 전 내용이 출판된 이후, 교회 권위자들은 더 이상 의학적인 다른 자료들 없이도 자살한 사람이 누구든 종교적인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했다. 1983년 교회법은 자살이 ‘교회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절망에 빠진 사람의 표지’라고 파리 주교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더 이상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식 표명된 것이다. 이전에는 자살이 ‘죄’로 규정되었지만, 오늘날은 ‘불행’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로마의 성베드로성당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얀 팔라크의 자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증언으로도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결한 개인의 희생의 의미와 이웃사랑의 가치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선언은 납득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살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실로 자살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뿐 아니라, 그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자살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름을 들면 익히 알 만한 많은 유명인들의 자살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이런 사실은 지면관계상 일일이 들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지만 자살을 극복하자는 취지에도 위배되는 것이어서 생략해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중세 때 신앙의 이유로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살했다는 사실은 많이 축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아팠다. 더욱 세상과 단절하고 신앙에 정진하고자 했던 순수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존엄사까지 논의되는 시대…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 선행돼야

그럼에도 자살의 역사적 고찰은 단편적·편협적인 시각을 열어주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자살을 이해하는 관점이 고작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식에 머무르지 말아야 하고,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포용적이면서도 예방적이어야 한다는 과제를 던졌다고 본다. 그렇다고 자살한 사람을 허용하고 넘어가자는 의도는 절대로 아니지만, 적어도 자살한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정죄하려는 의도는 지양돼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책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살은 건강한 정신상태에서가 아니라 병리적 상태에서 시도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이 자살자의 장례를 거행하는 것처럼 개신교도 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그 결과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이런 시각은 물론 자살이 생명의 관점을 기초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도 있고, 독재에 항거해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으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버리는 일이 된다. 이를 두고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에는 의학의 발전에 따라 안락사(euthanasia or physician assisted suicide)와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의 경우 존엄하게 죽을 권리 등이 문제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생명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 이해와 더불어 자살은 더욱 다각도로 연구돼야 할 것이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한국상담치료연구소: 02-2202-3193, www.kocpt.com
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