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부들은 왜 자살을 ‘회개할 수 없는 죄’로 봤을까
김충렬 박사의 ‘살자’ (5) - 교부들의 자살론 [2009-02-06 06:40]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우리는 고대에는 자살이 신의 뜻에 위배한다는 사상을 고찰했다. 이 시대구분은 물론 정확한 기독교 교회사의 구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런 기독교적 정확성보다는 특징을 살려 임의적으로 시대를 구분해 나갈 것이다. 확실히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영혼론을 중요시해 우리에게 영혼불멸의 선물을 가져다 줬다. 이는 영혼불멸을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고맙기까지 하다. 그들에게는 우주의 원리를 밝히려는 의도가 영혼이 중심에 자리했다는 점에서 자살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분위기가 교부시대에 들어오면 자살은 더욱 정확하고 엄격하게 신앙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를 다음의 몇 가지로 특징화할 수 있을 것이다.
1) 스토아 철학자: ‘행복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살이 정당화
그리스 철학의 뒤를 이어 헬라 문화가 로마로 이행되던 시대가 있었다. 이 시대는 물론 기독교가 대중적인 종교로 등장하기 전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야 한다. 이 시대에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상의 중심에 선다. 대부분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도덕성에 따라 자살이 도덕적으로 허용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사람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삶을 자연스럽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삶에서 육체적 건강과 같은 행복할 수 있는 본성적인 유익성을 상실하였을 때, 현명한 사람은 그 점을 인식하고 스스로 삶을 끝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가 행한 자살이 그 사람의 윤리적 미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 뿐 아니라 개인의 선(善)도 자살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살한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단지 사는 것이 선(善)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선이다.”, “현자는 그가 가능한 만큼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야 할 만큼 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네카에게는 적어도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 중했던 것이다.
2) 락탄티우스: 자살은 불명예스럽고 가증한 것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자살이 일정한 틈을 보이던 것이 교부 시대에 이르면 엄격하게 그 문이 닫히고 만다. 교부 시대에 이르면 자살은 살인과 같은 행위로 죄악시하게 된다. 교부 시대부터 기독교는 자살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살인과 같은 것이라고 죄악시하게 됐다.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하면 자살은 불명예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는 자살을 윤리적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살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려는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철학자들에게 철퇴를 가한다. 이는 교부 시대에는 자살을 자신을 죽이는 살인행위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부시대에도 순교 정신으로 자살하는 경우나 덕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해하는 태도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3) 아퀴나스: 자살은 회개할 수 없는 죄
자살은 살인행위에서 이제 회개할 없는 죄로 규정된다. 여기에 어거스틴(Augustine)은 그 선봉에 선다. 어거스틴은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Thou shalt not kill)”가 이미 자살을 금하고 있다는 견해를 들어 자살을 회개할 수 없는 죄악으로 단정했다. 그는 <신국론>에서 ‘어느 누구든 범죄자조차 개인적으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어떠한 법도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살인자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난에 대해 스스로 결백할수록 자살을 통하여 죄를 더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 ①자살은 ‘자기를 사랑하라’는 자연법(natutal self-love)에 어긋난다 ②자살은 자살자가 속한 공동체에 상처를 준다 ③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생명의 의무를 어기는 것이다 등을 들어 어거스틴의 견해를 옹호한다. 이런 견해는 중세 교회에서는 교의로 성문화되기도 했다. ‘신체에 대한 인간은 단지 사용권(usus)을 가질 뿐이며, 하나님께서 지배권(dominium)을 갖기에 자살은 인간 존재와 하나님의 관계를 무효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교의에 따라 그 당시에는 자살자의 재산을 몰수해 기독교적으로 장례를 치루지 못하게 했다. 자살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4) 어거스틴: 자살은 영혼을 더럽히고 공동체에 대항하는 죄
앞에서 우리는 자살이 살인행위요 회개할 수 없는 죄라는 점을 고찰했다. 이런 관점 외에도 교부들에게서는 또 다른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와 공동체와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는 대목이다.
락탄티우스(Lactantius)가 자살자를 살인자로 정죄했다면, 자살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한 어거스틴은 자살을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다시 ‘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고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구원을 얻게 하는 회개의 기회를 남겨 놓지 않았다. … 그는 비록 죄 때문에 자살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죽임으로써 또 다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물론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라는 것은 신앙의 회개와 연관되는 특성이다. 그런 이유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것은 영원불변한 영혼을 끊임없이 돌봐야 한다는 시각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돌봄은 특히 이 땅에서 잘 수행돼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실로 영혼의 고결함의 유지와 아울러 그 책임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살은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라는 점 외에도 공동체에 대항하는 죄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더욱 특이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다음의 글을 통해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항하는 죄라는 인식을 밝히고 있다.
‘자살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첫째, 만물은 자신을 사랑함이 당연하다. 그러기에 만물은 자신을 보존하고 적대적인 힘에 대항하려고 애씀이 당연하다. 자살은 자신의 자연적 경험성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자신을 마땅히 보호하려는 자비로운 마음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부분은 그 자체로 한 전체의 부분이 된다. 한 사람은 그 자신으로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게도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셋째,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해 주신 선물이다. 이에 생명은 생과 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복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빼앗는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의 노예를 살해함으로써 그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은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일에 자신이 권한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과도 같다. 생과 사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아퀴나스의 견해는 “하나님께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은 바로 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구약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5) 소결론: ‘자살의 공동체성’ 유난히 강조한 교부들
아퀴나스는 생명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관련돼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개인의 사건이 아닌 공동체와 연관된 공동체의 사건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는 생명의 개인성보다는 공동체성을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헬라의 국가론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공동체성을 중요시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원인이야 어쨌든 간에 그가 생명의 연대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것은 생명은 그리고 영혼은 혼자서 살아나가고 돌보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나가고 함께 돌보아야 한다는 존재라는 점이다.
교부들의 자살에 대한 관점은 신앙이라는 점에서는 한 치의 양보를 허용하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실로 엄격한 것이었다. 이런 엄격함에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귀중성, 공동체성의 연대성, 그리고 영혼의 돌봄에 대한 책임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아니 어쩌면 신앙에서 잃어버린 점일지 모른다. 그러기에 이것들을 잘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기독교인 자살의 목회적 해답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촌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한국상담치료연구소: 02-2202-3193, www.kocpt.com
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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