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살(自殺)
김충렬 박사의 ‘살자’ (4) - 자살의 역사적 관념변화 [2009-01-28 07:06]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1.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유형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자살을 시대적으로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살은 시대마다 그 관점이 상당히 다르게 변해오고 있으므로, 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관점의 변화는 물론 시대마다 생명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고 있다. 실로 자살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점과 삶의 당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자살이 부쩍 증가하는 것도 이런 생명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고대의 자살에 대한 이해: 신의 뜻에 위배
고대(古代)는 기독교가 일정한 틀을 이루기 전이다. 이때 기독교는 보편적인 고대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일반 대중종교가 중요시하는 몇 가지 개념들을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신(神)은 불가시적이고 초인간적인 영원한 힘으로 인간의 운명을 통제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다. 여기에 기도, 의식(儀式)이나 제사에 의해 예배되고 회유되는 힘들의 실존을 믿은 것이다. 이 시대에는 신, 우주 그리고 자연이 관심사이던 시대적 상황에서 우주의 생성을 밝히려는 그리스의 철학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이때의 관심은 물리적 우주와 인간의 영혼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면서 물질 안에 갇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고대의 자살은 영혼론을 기초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2) 소크라테스: 생명의 주인에게 죄를 지음
신, 우주 그리고 자연에 관심을 갖던 시대에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그는 철학자들이 외부적인 데만 관심을 갖던 당시 풍조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신이 우주와 인간을 만든 ‘주인’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신이 만든 우주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 그 영혼이 중요시된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사고의 대상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사용하여 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그는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영혼은 도덕성을 기초로 신중성과 절제, 용기와 정의 등의 덕(德)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이런 시각에서 자살은 “생명의 주인되시는 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자기의 감옥의 문을 두드릴 권리가 없는 수인(囚人)이다… 인간은 신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스스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자살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3) 플라톤: 자신의 생명에 상처를 주는 행위
플라톤에 이르러 그리스 사상은 절정에 이르게 됐다고 알려진다. 신비적 경건을 소유한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의 원초적 영혼을 설명한다. 그는 특히 인간의 영혼이란 육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육체와는 별개의 것이면서 육체의 파멸 후에도 죽지 않는다는 이른바 ‘영혼불멸론’을 역설했다. 영혼은 육체가 갖지 못하는 불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영혼은 이데아를 고향으로 진선미를 추구하며 인격적인 신과 만나고 이 세계와 교제하는 가운데서 최고의 만족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자살을 “스스로 영혼을 육체로부터 풀어주는 행위”로 이해한다.
플라톤은 <파이돈(Phaedon)>에서 자살이란 신체에서 영혼을 스스로 풀어주는 것으로 보았지만, 나중에 <율법(Nomoi)>에서는 자살을 매우 수치스러운 것으로 규정, “죽음의 의도와 동기를 의식하면서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여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자살이 자기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 행위로서 어느 정도의 의도를 가지고 동기를 인지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행한 상해(傷害)라는 견해다. 이런 견해는 인간의 영혼이란 하나님이 내린 것이기에 자살은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함부로 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자살은 신체에서 스스로 영혼을 풀어주는 행위로 신의 뜻에 위배되는 잘못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플라톤은 자살이란 매우 수치스러운 행위이기에 자살자는 ‘묘비도 없이 묻어야만 한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매정한 정죄적 관점과는 달리 자살자의 예외적인 경우를 두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예를 들어, 마음이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하여 구원받을 여지가 없는 경우, 소크라테스처럼 법정의 판결에 의한 자살인 경우, 피할 수 없는 최악의 개인적인 불행 때문에 도무지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누가 봐도 불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수치심 때문에 자살한 경우 등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에서도 용서는 될 수 있지만 자살행위 자체는 개인이 저지른 비겁한 짓으로 비난받는 것을 면치 못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경우들은 현대의 자살을 이해하는 단초를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 자살은 비겁한 행동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신비적 정신이 훨씬 덜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와 보이는 현상이 서로 상호적 실체로서 존재한다.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질료에 대한 현상적인 힘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신은 제일동인(動因)으로서 세계 발전 과정의 시작일 뿐 아니라 목표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감각적인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요소인 로고스를 가진 영원한 존재이다.
이런 그가 자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단지 <니코마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살은 불법적인 것이고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논조다. “자살은 그 사람 자신에게는 부정이 될 수 없다 해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가난, 연애라든가 그외에 어떤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용감한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 아니라 도리어 겁장이가 하는 일이다. 괴로움을 피한다는 것은 게으름뱅이의 짓이며 자살하는 사람들이 죽음 앞으로 다가서는 동기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름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피하는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소결론: 자살 연구보다 영혼론 연구가 선행돼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살에 대한 견해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자살하는 개인의 자율성과 개인적인 안녕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의 자살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우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자살은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함부로 다룰 자격이 전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의 자살론에서 영혼론이 기초가 됨을 발견하면서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단순한 죽음을 위한 행위 뿐만 아니라, 먼저 기독교의 영혼론을 연구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자살과 관련해 생명의 귀중성과 함께 영혼론을 더욱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한국상담치료연구소: 02-2202-3193, www.kocpt.com
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심리/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충렬 박사의 ‘살자’ (10)- ‘자살=지옥’보다 예방대책이 우선 (0) | 2009.03.19 |
---|---|
김충렬 박사의 ‘살자’ (9)- ‘개인’ 중시하다 보니 자살도… (0) | 2009.03.19 |
김충렬 박사의 ‘살자’ (8) - 개인 자유와 동시에 책임도 강조 (0) | 2009.03.19 |
김충렬 박사의 ‘살자’ (7) - ‘자살의 예외’ 논의되기 시작하다 (0) | 2009.03.19 |
김충렬 박사의 ‘살자’ (5) - 교부들의 자살론 (0) | 2009.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