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시대, 자살도 ‘낭만적’으로 생각?
김충렬 박사의 ‘살자’ (9)- ‘개인’ 중시하다 보니 자살도… [2009-03-10 06:39]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6. 자살의 역사적 이해-(3) 르네상스 시대
7. 자살의 역사적 이해-(4) 종교개혁 시대
8. 자살의 역사적 이해-(5) 계몽주의 시대
9. 자살의 역사적 이해-(6) 낭만주의 시대
낭만주의(Romanticism)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사조다. 이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강한 인상을 특징지웠기에 한 시대로 구분하고 지나가려 한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지성과 규범 등을 절대시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종교 도덕 형식주의를 부정하고 인간 내면의 진실과 감정을 중시, 주로 연애, 자연, 동심의 세계를 다룬다. 낭만주의는 프랑스 혁명정신, 나폴레옹 전쟁, 괴테의 작품 등의 영향으로 합리주의보다 비합리적인 자유, 그리고 개인의 감정을 존중하는 풍조가 조성됐다. 인간의 존엄성이 중요시됐지만 근간은 규제와 형식을 탈피하려는 정신에 따라 고정적인 법칙을 거부하고 자연이라는 내면적 본질에 따른 자유롭고 구속없는 자유와 영원한 창조력을 지니는 인간성을 중요시했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말이지만 시대적으로는 이성을 중시하던 계몽주의의 반발로 일어난 수정주의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1) 자살은 죄악이 아니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얽매이는 것을 벗어나고자 했다. 인간이 가진 내면의 진실을 마음껏 드러내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에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간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 감상적인 욕망을 갖는 이상세계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가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성, 즉 객관성을 중요시했다면 낭만주의는 주관적 감정을 중요시했다. 주관적 감정이 중시되는 측면에서 자연히 인간 존재나 그 존엄성이 중심을 차지한다. 문학에서도 인간의 상상력이 활용되고 신학에서는 주관적 감정인 ‘절대의존 감정’이 특징으로 정리된다.
이런 낭만주의에서는 자살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유롭게 허용되는 분위기가 흘렀다. 자살은 죄악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능히 일어날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살에 대해 획기적인 인식 전환이 일어나게 됐다.
그 첫 시도는 존 던(John Donne)의 <자살론(Biathanatos)>에서 이뤄진다. 그는 자살을 반드시 죄악으로 단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입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전과 근대의 여러 법적 자료와 신학적 자료를 제시한다. 특히 그는 성경이 자살에 대해 명확히 비난하지 않았고, 기독교 교의는 순교나 사형, 그리고 전쟁 중 죽음 같은 다양한 죽음이나 죽임을 허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핵심적인 주장은 자살에 대해 정당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노력으로 자살이 반드시 신의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논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자살이 자기 보존을 명하는 자연법에 어긋나는 행위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도 자연법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사회적 관습이나 교회, 성경에 비춰 율법 및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윤리학적 관점에 바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자살이 인간 존엄성의 발현인가?
낭만주의는 기독교에도 영향을 줬다. 특히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시라는 패러다임에 변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인간 이성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 ·통치하시고 우리 삶의 주인이시라는 ‘신의 주권성’ 인식이 있었다. 그 효과로 인간이 자기 생명에 충실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이었고, 그러므로 모든 자살은 ‘신성모독’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살을 돕는 자들도 죽음을 선고받을 정도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됐다. 이때 자살을 생각했던 기독교인들은 다른 완곡한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다. 신앙의 금기, 지옥에 대한 공포, 새로운 철학의 경향들이 어우러져 자기 몸에 손을 대지 않고도 자신을 파괴하는 완곡한 방법을 종종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 몸에 자기가 손대지 않으면서 간접적으로 믿음에 의지하며 고요하게 자기 목표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들어서면서 자살이 비교적 자유롭게 논의됐고, 때로는 미화됐다. 이는 낭만주의가 인간 영혼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것들, 즉 논리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체험의 영역이 중요시된 결과였다. 낭만주의는 오로지 직접적·감정적으로 자유로운 내면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했고, 인간의 감정은 주관적 감정이며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사상과 교리에 얽매인 인간 존재는 이제 그 형식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맞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의 정열적이며 까다로운 천성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자유롭게 파괴하는 낭만적 영웅을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문학에서도 그 중심적 역할을 하던 빅토르 위고가 ‘낭만주의란 문학에서의 자유주의’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중시됐다. 그러다 보니 낭만주의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살까지도 미화될 뿐 아니라 특히 광적인 사랑이 전쟁 후유증, 혁명사상 등과 시너지 효과를 가져와 자살, 폭력, 살인 등의 비합리적인 감정 표현이 핵심주제가 되는는 특징이 생겼다.
자유를 추구하는 낭만주의 시대에서도 괴테는 그 선봉에 선다. 18세기 말 독일에서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써낸 것은 이 흐름에 불을 당겼다. 괴테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상당 부분을 가져온 이 소설에서 젊은 베르테르는 다른 남자와 곧 결혼하게 될 로테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 소설은 출간 즉시 ‘베르테르 열기’라 불릴 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무명 작가였던 괴테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베르테르의 열기는 곧 당시 사람들이 소설 속 베르테르의 죽음을 모방해 자살하는 데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그 높던 교황과 황제의 권력과 권위도 이미 무너졌거나 무너져 가던 18세기 사람들은 이미 자살을 죄악이라고만 생각하던 시대를 한참 지나 있었다. 괴테의 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낭만주의 영향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서 나타나는 자살은 더 이상 추한 모습이 아니었다.
3) 자살은 고통의 해결책?
자유로운 낭만주의는 자살까지도 자유로운 행동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상황이나 환경은 자살이 그 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명분이 뚜렷한 자살, 사랑의 고뇌에 몸부림치는 가운데 일어난 자살은 미화됐다. 물론 자살의 낭만주의적 관점은 주로 문학가들에 의해 시도된 측면이 강하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그리고 플로베르(Gustare Flaubert) 등은 작품 속에서 자살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이 시대 자살은 베르테르, 맨프레드, 르네와 같은 주인공들에 의해 특징지어졌고, 이들의 자살은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사랑하는 연인에 의해 버림받거나 사회에서 격리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영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살이 고통의 해결책이라는 사상은 낭만주의 배경에서 더 이해되고 있다. 낭만주의는 고전적이고 형식에 매이는 틀을 탈피하려는 자유로운 개인의 인격 존중이 중심이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들은 지나친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인간 정신의 창조적 상상력과 직관적 분별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학에서도 덮어놓고 절대 초월자로서의 신을 떠올리기보다는 주관적 신앙 경험으로 발견된 신이 더 중요시됐다.
신앙이란 교리적 명제 속에 갇혀있을 수 없으며, 신적 존재에 대한 감정적 이해와 내적 헌신을 수반한다. 인간의 사유와 이성은 그들 고유의 영역과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절대자에 대한 이해는 오직 신앙적 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상은 일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절대자에게 향하는 직관적 감정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기독교 교리와 신비적 요소는 세속적 방법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초월적인 절대자가 인간 세계와 동떨어져 ‘저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 관점에서 지옥과 천국, 부활과 구원 같은 오래된 주제들을 재해석했다.
물론 낭만주의 이전이라고 자살을 항상 나쁘게 본 것만은 아니었다. 기원 전부터 트로이 영웅 아이아스(Ajax)의 자살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과감한 결단으로 보여졌고, 로마 제국의 탄생을 이끈 루크레티아(Lucretia)의 자살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려 했던 상징으로 중세가 끝나가던 르네상스 시대부터 중점적으로 두고두고 칭송됐다. 이렇듯 서구에서는 카톨릭의 힘이 강력했던 중세만 제외하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살을 포장되거나 이해해 왔다.
4) “자살은 죄!” 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일단 자살할 마음 먹으면…
우리는 이런 낭만주의의 자살에 대해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낭만주의도 모든 자살을 미화하거나 자유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낭만주의가 시대의 고통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극도로 민감한 몽상가로만 비춰지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다. 새로운 시대의 사고 방식을 표현하는 진정한 낭만파는 시대의 고통과 정면으로 맞서는 천재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살자의 심리를 이해하고 예방하려는 관점에서 이런 낭만주의 경향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은 19세기 전반 이후 계속되지 못했으나, 무엇보다도 이성적 질서와 균형잡힌 형식미를 존중했고, 정적(靜的)이며 조각적이었던 고전주의에 반대한 결과로 일어났다. 여기에 정열적 자아의 해방, 국민적·지방적 전통에의 복귀, 자연에 대한 사랑, 명상적 신비주의, 미적 회고취미(懷古趣味), 이국정서 등을 통해 상상력의 폭을 넓혔다. 서정시에 음악성을 회복시키면서 현실에의 관심을 자각시켜 상징주의와 사실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이런 낭만주의 경향은 자살자들의 심리를 잘 드러낸다. 우리가 아무리 “자살은 돌이킬 수 없는 죄요, 자살하면 지옥간다”고 떠들어댄다 해도 그들은 압박하는 현실의 굴레를 자유롭게 벗어나고 싶고, 심리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자살하면서 “하나님 곁으로 간다”고 합리화하는 자살자들
자살자들의 자유로운 감정이나 의도를 고려해 우리는 신앙 만능만을 강조해서 자살을 막으려는 단순한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논리와 이성의 우위성을 강조해 설득하려 해도 이미 부정적 감정으로 압도된 상태에서는 별다른 효력이 발휘되지 않을 수 있다. 자살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는 설득되지 않으려는 더 강력한 부정의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과 이성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설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심리적 반발이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상태는 아마도 그들을 새로운 신앙의 신비주의로 합리화시키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의 삶이 너무나 힘들어 “나는 하나님 곁으로 가노라!”고 유서로 남기는 형태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확실히 낭만주의 입장에서는 자살을 허용하고 합리화시키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낭만주의 입장이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런 입장에서는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오로지 개인의 이익과 행복으로 두게 되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낭만주의의 입장이 일면 치우친 측면이 있지만 자살자의 상황이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점을 환기시킨 점에서는 평가받을 수 있다. 자살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형태의 자살을 하든 간에 심각한 심리적 고통, 즉 거의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그 책임을 묻는다 해도 무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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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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