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싸지르기

릴케의 중기 시작품에 보이는 사랑의 관념 -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정순

릴케의 중기 시작품에 보이는 사랑의 관념  - 소유하지 않는 사랑

 

이정순





 릴케의 중기문학, 특히 그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말테의 수기』와 1912년에 쓰여진 제1, 제2 悲歌 속에서 깊이와 밀도를 얻으며 그 중심테마로 부각되는 릴케 특유의 소위 “대상을 초월한 사랑 intransitive Liebe”, 혹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 besitzlose Liebe”의 개념이 최초로 형성되는 것은 여러 증거로 보아, 1905년 그가 17세기 폴투갈의 수녀 마리아나 알코포라도 Marianna Alcoforado(1640-1723)의 서간문들을 처음 접하면서였던 것 같다.

그녀의 서간문들은 이미 여인들이 사랑함에 있어 남성보다 더 위대한 완성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던 릴케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새겨져 1907년에는 이 서간문들에 대한 짤막한 수상문 속에 담겨져 나온다.

그 후 수년간 릴케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여류시인 사포 Sappho이래 역사적으로 사랑에 “배신당한 여인들 die Verlsassene”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 몰두하기도 하였으며, 1913년에는 직접 알코포라도 수녀의 서간문들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릴케는 그들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 die großen Liebenden” 의 고통과 자기비하 속에 견뎌내는 인간성에서 가장 순수한 의미로서의 “완성된 인간성의 체형화(體形化)”를 발견하였으며, 그들의 사랑의 간절함과 강도 속에서 차라리 대상을 초월하여 무한대로 뻗는 사랑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침내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더 이상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 즉 “소유하지 않는 사랑”의 전형을 발견하였다.

진작부터 진정한 사랑의 방법은 “우리에게 과해진 가장 어려운 작업이며 ... 그에 비하건대 다른 모든 작업은 예비에 지나지 않는,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서 ... 우리가 오직 배워서만 익힐 수 있다”는 생각이, 적어도 창작이념 속에, 각인되어있던 릴케에게 이들의 사랑의 방식은 배워 익혀야 할 본보기가 되었다. 수년간에 걸친 그러한 릴케 특유의 “작업 ausarbeiten”은 결국 “사랑”이라는 어휘에 하나의 개념적 심도 begriffliche Schärfe를 부여하여 릴케 중기문학 속에 중심 테마로 확립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 특히 남녀간의 사랑을 염두에 두고 취했던 이러한 태도는 그러나 거기 그치지 않고, 『말테의 수기』속에서 이미 전체 대상계를 향한 사랑으로, 그리고 후기문학 속에서는 그 무상함까지도 포함된 삶의 총체에 대한 긍정과 예찬으로 이어져 “대지를 향한 사랑”(제9비가)이라는 릴케 문학의 대단원을 이루는 주제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본 작업에서는 주제와 관련된 몇몇 중기 및 후기 시작품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릴케의 다양하고 과장된, 심지어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관념들 중에서 이른 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의 관념에 주목하여 그 의미영역이 확대 심화되어 가는 맥을 따라 그 가장 연장된 의미로서 시인이 제시하는 존재방식으로 고양되고 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Ⅱ.

아직 『말테의 수기』를 집필 중이던 1907년 8월, 파리에서 나온 시 「사랑하는 여인 Die Liebende」 속에는 상대방을 떠나보내는 사랑이 여인의 독백 속에 섬세하게 담긴다. 전문을 인용하면,

저것은 나의 창문, 방금
나는 가만히 깨어났다.
내가 둥실 뜨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어디까지 나의 삶은 가 닿는 걸까,
그리고 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지 ?

주위 모든 것이
아직도 나 자신일 거라고 생각해도 될 듯,
水晶 깊숙이처럼 투명하고
어둡고 고요하다.

아직 별들까지도 나의 내면에
품을 수 있을 듯, 그만큼이나
나의 심장이 크게 보인다. 그렇게 기꺼이
그것은 그이를 다시 놓아주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기 시작한,
마음 속에 간직하기 시작한 그이를.
생소하게, 한 번도 씌어진 적 없었던 듯
나의 운명이 나를 응시한다.

어이하여 나는 이 무한대 아래
놓여져 있을까,
초원처럼 향기를 풍기며
이리저리 일렁이면서,

부르며 동시에 누군가가
그 소리 들을까 조바심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 속에서
파멸하도록 운명지어져.
Das ist mein Fenster. Eben
bin ich so sanft erwacht.
Ich dachte, ich würde schweben.
Bis wohin reicht mein Leben,
und wo beginnt die Nacht ?

Ich könnte meinen, alles
wäre noch Ich ringsum;
durchsichtig wie eines Kristalles
Tiefe, verdunkelt, stumm.

Ich könnte auch noch die Sterne
fassen in mir; so groß
scheint mir mein Herz; so gerne
ließ es ihn wieder los

den ich vielleicht zu lieben,
vielleicht zu halten begann.
Fremd, wie niebeschrieben
sieht mich mein Schicksal an.

Was bin ich unter diese
Unendlichkeit gelegt,
duftend wie eine Wiese,
hin und her bewegt,

rufend zugleich und bange,
daß einer den Ruf vernimmt,
und zum Untergange
in einem Andern bestimmt.    (SWI. 621f)

시는 전통적인 역할시(役割詩)Rollengedicht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이며 주체자인 사랑하는 여인의 독백은 그녀 자신의 내면적 상황의 진술로 시작하지 않고, 구체적인 것, 공간적 시간적으로 규정되는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시작된다.

시의 첫 두 행은 얼핏 중세의 “새벽노래 Tagelied” 같은 상황을 연상시킨다. 사랑의 밤을 지낸 뒤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문, 그리고 바깥에 새소리라도 곁들인다면 영락없이 불륜의 연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새벽노래”, 혹은 “이별가”의 전형적 상황이다. 그 같은 연상은, 5행의 “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이르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 이전 3행의 “내가 둥실 떠오르는 듯 싶다”는 접속법 2식 표현 속에 이미 여인이 이제 막 선잠에서 깨어났음이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아직 잠에 취해있는 그녀는 허공중에 둥실 떠있는 기분이고(2/3행) 창문을 쳐다보았으나 바깥은 아직 밤이다. 이렇게 시를 시작하는 “저것은 나의 창문”이라는 첫 마디는 여인의 외적 상황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이어 진행되는 내적 변화의 기점이기도 하다.

“창문”은 바깥 넓게 펼쳐진 공간 das Offene을 내다보며 그 바깥공간을 받아들이는 장소, 즉 내면과 외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특히 연인(戀人)과 창문은 예로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릴케에게서도 창문은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곳”(2. Elegie, SWI. 691, V. 61)이며, 제 7비가에서는 연인을 기다리던 여인이 천사의 출현을 맞이하는 곳으로 환기(喚起)되기도 한다.

한 편 창문은 그 틀로써 양자간의 거리와 간격을 만든다. 이 간격은 밤, 혹은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의 무절제한 몰입에 절제를 마련해 주면서 동시에 다시금 자기 자신에로 되돌아오는 일 Zu-sich-Selbst-Bringen을 가능케 하여준다. 따라서 거기 체험되는 모든 것과의 일체감은 “투명하다 durchsichtig”(8행).그리고 별들과의 교제가 가능하다. 별들과의 교제와 더불어 여인의 심장은 그 자체가 우주공간이 되어 그 속에 별들까지 품을 듯 드넓어진다.

“심장 Herz”은 릴케의 가장 초기 작품으로부터 그의 최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가장 내면적인 기관(器官)이면서, 모든 감관(感官) 기능의 중심체로서 생명과 사랑이 감지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훗날 비가에서 “볼 수 있는 것 das Sichtbare”이 “볼 수 없는 것 das Unsichtbare”으로의 변용이 이루어지는 곳, 즉 존재의 장소로 승화될 것이다. 그러한 여인의 심장이 이제 우주를 닮아 별을 그 안에 품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고귀하게 무한히 너그러워진다(10-12행). 잠 못 이루며 그리워하는 사람마저 떠나보낼 수 있으리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일 loslassen”은 특정한 대상을 사랑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그 대상에 대한 일방적 베풀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까지는 연인만을 향해 세계를 “원근법적으로 perspektivistisch” 축소시키고 자신을 그의 포로로 만들었으나 연인을 놓아보냄으로써 이제 전체 대상계를 향해 자신을 여는 일이다.그리하여 애인을 떠나보낸 여인은 제1비가의 연인(戀人)들처럼 “자신의 운명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SWI. 685, ... Ach sie [die Geliebten] verdecken sich nur miteinander ihr Los...). 여인은 거리와 절제를 터득하였기에 자신을 포함한 인간 모두의 운명인 “대립상태 Gegenübersein”(8. E. SWI. 715)를 정시할 수 있는 것이다(17/18행).

이어 시의 5연에서는 연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여인이 무한대와의 교류 속에서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는 초원처럼 풍성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향기”는 만져지지도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흔적 없이 다가와 “내면을 참되게 하는 근접” 그 자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어 전체 대상계를 향해 뻗는 사랑의 본성에 정확히 일치되는 능동적인 베풀음의 상이다.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 즉 연인에 대한 단념은 보다 더한 사랑과 고통이 요구된다. 떠나보내는 사랑이 위대할 수 있는 것은 거기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시의 마지막 연은 바로 연인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아픈 마음이 읊어진다. 이 아픔을 릴케는 인간이 앓아온 숱한 고통 중에서 “가장 오랜 고통 der älteste Schmerz”(1. E. SWI. 687)이라고 후에 비가에서 다시 환기하게 된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불러서 되돌아오게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그 심경이 행여 눈치 채일까 조바심 내는(22-23행), 그래서 “죽도록 zum Untergange”(24행) 그이만을 혼자 그리워하도록 운명지어진다. 이러한 고통이 있기 때문에 연인을 잃은 여인은 사랑에 “충족된 여인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1. E. SWI. 686 : die Verlassenen, die du so viel liebender fandst als die Gestillten...)이라고 역시 후에 제1비가에서 예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강도(强度)로써 상대를 오히려 초월하고 자신을 더욱 풍성하게 하게 하여 마침내 여인은 “사랑 받는 이 die Geliebte”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 die Liebende”가 되는 것이다. “사랑 받는 연인으로서 위험 속에 그릇되게 살지 않고 ...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안정 속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고통을 통한 안정의 획득이 이 시가 쓰여지던 같은 시기에 계속 집필 중이던 『말테의 수기』속에 “위대한 사랑하는 여인들”이 회상되는 한 중간에 삽입된 한 사랑의「노래 Lied」속에 그려진다.


Ⅲ.

위에 다룬 시,「사랑하는 여인」이 『신시집』의 특징이기도 한 객관적 서술 속에 연인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심경을 접속법 형태로, 즉 “...듯 하다”는 확고하지 못한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면, 이 사랑의 「노래」는 사랑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절절히 전하는 역설적 구도를 띈다.

당신이시여, 당신께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밤마다
울며 지새노라고,
밤의 존재가 마치 요람처럼
나를 지치게 한다고.
당신이시여,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으십니다,
나로 인해 깨어 계심을.
우리가 이 豪奢를
충족시킴 없이
내면에서 견뎌낸다면 어떠할까요 ?
. . . . . . . . . . . . . . . . . . .

사랑하는 이들을 보셔요,
사랑의 고백이 겨우 시작되었건만
얼마나 빨리 속이는가를.
. . . . . . . . . . . . . . . . . . .

당신은 나를 혼자이게 하십니다. 오직 당신만을 나는 바꿔 혼동할 수 있습니다.
잠시 당신은 그것이다가, 어느새 그것은 다시 물소리입니다.
아니면 흔적 없는 향기이거나.
아, 나의 품안에 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만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십니다.
내 당신을 결코 붙들지 않았기에, 당신을 영원히 간직합니다.

Du, der ichs nicht sage, daß ich bei Nacht
weinend liege,
deren Wesen mich müde macht
wie eine Wiege.
Du, die mir nicht sagt, wenn sie wacht
meinetwillen :
wie, wenn wir diese Pracht
ohne zu stillen
in uns ertrügen ?
_ _ _ _ _ _ _ _
Sieh dir die Liebenden an,
wenn erst das Bekennen begann,
wie bald sie lügen.
_ _ _ _ _ _ _ _
Du machst mich allein. Dich einzig kann ich vertauschen.
Eine Weile bist dus, dann wieder ist es das Rauschen,
oder es ist ein Duft ohne Rest.
Ach, in den Armen hab ich sie alle verloren,
du nur, du wirst immer wieder geboren :
weil ich niemals dich anhielt, halt ich dich fest.    
〈Aus den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SWII. 37)

앞서 「사랑하는 여인」에서는 제목이 규정하는 대로 여인의 자제된 사랑이 고백되고 있었는데 반해, 여기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사람은 남성이다. 시의 도입 행에 “너 Du”라는 호격을 받는 관계대명사가 여성 3인칭인 것으로 보아 시의 화자이며 주체자인 “나”는 상대적으로 남성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시의 서사적 줄거리가 서정적 자아의 상대방을 향한 일방적인 진술 속에 전개되어 가는 시의 첫마디는 거리와 절제를 의식하며 진술된다. 서정적 자아는 연인에게 자기가 그녀를 그리워하며 어떻게 고통스럽게 밤을 새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참된 사랑이란 “상대방이 자신이 바치는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 이상 개의치 않고” 바치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힌다는 공포감보다 더 지독한 구속은 없다.”고 릴케는 생각했다. 내가 밤마다 겪는 사랑의 고통을 상대방에 알려 연민의 정을 유발시키는 것은 연인을 구속하는 것이며 참된 사랑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이어 “나”를 향한 “너”의 태도가 노래된다. 그녀 또한 “나”를 향한 사랑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느 연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헛된 사랑의 확신 속에 자신과 상대를 속인다(11-13행).

감성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덧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은폐하려”(1. E.)드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항상 “대립상태(8. E.)”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숨기고 서로에 집착하는 데에 감성적인 사랑의 허점이 존재한다. 사랑이 지속된다고 믿으려 하고 믿게 하려는 헛된 노력 속에 고귀한 사랑의 밤이 “환멸의 밤 enttäuschende Nacht”(1. E. SWI: 685)으로 전락된다. 그러나 “나”와 “당신”은 서로 고통과 슬픔을 혼자 새기며 밤을 지새움으로써 “환멸의 밤”을 “슬픔의 밤”(10. E.)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이다. 사랑의 고통은 인간감정의 가장 고귀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는 나와 너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당신은 나를 혼자이게 하십니다.    (15행)

이 한마디에는 이중의 의미가 포함된다. 무엇보다 그것은 시적 자아의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아쉬움에서 터져 나온 한탄의 소리로 들린다. 그리움의 도가 짙으면 짙을수록 외로움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편 릴케는 인간은 “승화되고 심화된 외로움” 속에 좌절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했다. “참된 사랑이란 결코 소모적이거나 탐닉하는 것이 아니며 제 2의 인간과의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진작부터의 소신이었다. 그러므로 “홀로 있음 Alleinsein”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오히려 바람직한 상황이다. 릴케는 진작부터 진정한 사랑이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지켜주고, 경계지으며 인사하는 그 속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를 혼자이게, 즉 외롭게 하십니다” 라는 말은, 릴케 자신의 생각을 따르면, 곧 ‘나는 당신에게서 가장 고귀한 방법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독 속에서도 상대방의 부재를 언제든지 다른 생산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물소리”로 때로는 “향기”로 “바꿔 혼동하며” 연인을 느끼는 것이다.

... 오직 당신만을 나는 바꿔 혼동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다가 어느새 그것은 물소리입니다,
아니면 흔적 없는 향기이거나,             (15-17행)

시의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릴케 스스로가 제시한다. 『말테의 수기』를 덴마크어로 번역한 잉가 융한스 Inga Junghans의 자문에 응하는 답변에서 릴케는 “혼동하다, 바꾸다 vertauschen”는 말을 이렇게 풀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갑자기 너무 엄청나게 벅차져서 나는 당신을 내어주지 않고도 다른 어떤 것, 바람소리라든가, 바다의 파도소리, 향기 따위들과 바꿔 혼동할 수 있다. 당신은 변용할 수 있기에 나는 당신을 잃어버리는 일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앞서 시「사랑하는 여인」에서 시적 자아가 애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대자연(초원)으로 향해 그 한 부분이 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어느 한 특정한 대상을 향해 원근법적으로 세계를 축소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게 현존재의 사명을 제시하여주는 세계 전체를 향해 나를 여는 일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 집착하는 한 그는 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그 원근법적인 사랑의 포로가 되어 전체 세계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다.시의 마지막 3행은 별로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릴케 문학에 중요한 모티프가 등장한다.

아, 내 품안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만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십니다.
내 당신을 붙들지 않았기에, 당신을 영원히 간직합니다. (17-19행)

연인을 떠나보냈기 때문에 텅 빈 품안은 그러나 공허하지 않다. 그 두 팔은 전체 대상계를 향해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확신으로부터 2년 후 1912년 12월 이 시인은 그의 첫 비가에서 “그대 품안의 공허를 / 우리가 호흡하는 공간들을 향해 던지라”고 연인들을 향해 깨우치는 것이다.

... 그대 품안에서 공허를
우리가 호흡하는 공간들로 던지라, 어쩌면 새들이
한결 넓어진 허공중을 보다 참된 飛翔으로 감지하리니.

...Wirf aus den Armen die Leere
zu den Räumen hinzu, die wir atmen; vielleicht daß die Vögel
die erweiterte Luft fühlen mit innigerm Flug.

연인을 품어 안기 위해 활짝 벌린 두 팔은 연인을 단념함으로써 육체적, 물리적으로는 분명 비어있다. 그러나 이 “빈 공간 das Leere”은 우리의 호흡과 함께 내면을 채우는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곳에 새가 날도록 하라고 촉구된다. 그 일은 바깥세계를 그 안에 옮김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바깥과 안의 만남은 곧 “세계내면공간 Weltinnenraum”의 실현이다. 세계내면 공간이란 일상적 시간 개념이 일체 배제된, 전 대상계가 “기억된 것, 즉 내면화된 것” 으로서 동시에 실재하는, 인간의 “극명한 의식이 머무는 유일한 곳”이며, “변용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항상 연인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오직 연인을 떠나보냄으로써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연인을 결코 붙들지 않았기 때문에”(20행), 그녀는 “세계내면공간” 안에 “항상 확고히 fest”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상태 Verlassensein”에 존재함을 의미하는 “떠나보냄, 혹은 떠남”은 다만 시작일 뿐이다. 연인에 버림받고도 그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는 “심장의 역사(役事)Herzensleistung”와 더불어 비로소 위대한 사랑의 행로는 시작된다. 어떠한 충족도 바라지 않는 그 속에,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취급할까 하는 일에 더 이상 구애받지 않으면서” (SWVI. 1002) 베푸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성취이다. 『말테의 수기』속에 상대방에서 초월한 사랑의 화신으로 그려지는 아벨로네를 특징짓는, “내가 알기로 그녀[아벨로네]는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모든 대상성을 제거하기를 희원했다...”는 이 한마디 속에 우리는 릴케 중기 사랑관의 핵심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곧 상대방을 더 이상 “소유하지 않으려 하는 사랑”, “상대방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말테를 집필하던 시기이기도 한 1908년 11월 말에 나온 시,「어느 벗을 위한 鎭魂曲」속에 이런 시인의 생각이 다시 표현된다.

소유할 권리를 지닌 자 어디 있는가?
그 누가, 스스로조차 지탱하지 못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
  과연 어떤 잘못인가가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잘못이니,
바로 우리 내면에 키우는 모든 자유를 다하여
사랑의 자유를 증대시키지 못 한 것.
우리는, 사랑함에 있어, 정녕 이것밖에 할 수 없음이니,
서로 놓아주는 일이다. 그럴 것이 우리가 서로 붙드는 일,
그것은 쉽지만 먼저 배울 일은 못되는 것이기에.
Wo ist ein Mann, der Recht hat auf Besitz?
Wer kann besitzen, was sich selbst nicht hält,
[...]
  Denn das ist Schuld, wenn irgendeines Schuld ist:
Die Freiheit eines Lieben nicht vermehren
um alle Freiheit, die man in sich aufbringt.
Wir haben, wo wir lieben, ja nur dies:
einander lassen; denn daß wir uns halten,
das fällt uns leicht und ist nicht erst zu lernen.

삶과 예술, 사랑과 예술 사이의 갈등 관계를 항상 절감해 오던 릴케는 세속적 삶(出産)을 위해 자신의 예술을 희생해야 했던 옛 벗의 요절에서 아까운 재능의 중단을 이렇게 절절히 아쉬워한다. 그는 일찍이 바로 이 여인에게 보낸 한 서간문에, “두 사람의 결합이 지니는 지고의 과제란 곧 각자가 상대방에게서 그의 고독을 지켜주는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밝힌바 있다.

『말테의 수기』종결부에 릴케는 성서 속의 탕자(蕩子)der verlorene Sohn의 우화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탕자의 이야기가 사랑을 거부했던 한 남자에 대한 전설이라는 것이다. 탕자는 사랑 받는 일을 곤혹스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사람이 되었던 그가 사랑 받는다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은 결단코 사랑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한다. 탕자에게 사랑이란 “관찰과 관심의 눈길”을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상대방을 탐욕하는 일이고 자기 자신의 뜻에 유리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그가 진정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이런 식으로 사랑하고자 한다.

... 그는 자신의 고독 속에서 사랑하곤 하였다. 매번 혼신을 다하여, 그리고 상대방의 자유를 [보장하여주기 위한] 말할 수 없는 조바심 속에서 사랑하곤 하였다. 그는 서서히, 사랑하는 대상을 그 자신의 감정의 광선으로 불태워 버리는 대신에 그 대상을 투명하게 비쳐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점점 더 투명하여지는 연인의 형체를 투시하여 저 광활한 곳, 그의 무한한 소유욕에다 이 투명한 연인의 형체가 열어 준 저 광활한 곳을 알아보는 환희에 젖어들어 갔다

Denn er hat geliebt und wieder geliebt in seiner Einsamkeit; jedesmal mit Verschwendung seiner ganzen Natur und unter unsäglicher Angst um die Freiheit des andern. Langsam hat er gelernt, den geliebten Gegenstand mit den Strahlen seines Gefühls zu durchscheinen, statt ihn darin zu verzehren. Und er war verwöhnt von dem Entzücken, durch die immer transparentere Gestalt der Geliebten die Weiten zu erkennen, die sie seinem unendlichen Besitzwollen auftat.

사랑은 여기서 새로운 특성을 얻는다.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한 조바심”으로 정의되는, “상대방을 꿰뚫어 투시하고자” 하는 일이다. 상대방을 투명하게 만들어 그것을 완전히 통과하여 나가는 일이란 곧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그것을 지나쳐 나아감, 즉 초월함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무대상성 Gegenstandlosigkeit”은 바로 탕자가 소년이었을 때 소망했던 “마음의 진정한 무관심 innige Indifferenz seines Herzens”(SWVI. 938)의 획득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감정의 자유를 부여하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저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이 얻었던 어느 특정한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무관심의 상태, 즉 마음의 평정으로 옮겨오는 일이며, 이때 제 8비가에서 노래하는 저 “순수한 공간 reiner Raum”(SWI. 714)이 열리는 것이다. 이처럼 연인의 존재가 지니는 가장 궁극적 의미는 그(그녀)가 “열린 곳 das Offene”으로의 통로가 되어준다는 사실에 있다. 이렇게 “비가”의 주제들은 작업되어 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랑 속에서 얻게 되는 참된 무관심의 경지는 숱한 밤을 연인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로 지새워야 하며(1/2행),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뎌내며 “서서히 배워갔던” 탕자처럼 우리도 배워 터득하여야만 한다. 진정한 방식의 사랑은 “우리에게 과해진 가장 어려운 작업이며 ... 그에 비하건대 다른 모든 작업은 예비에 지나지 않는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서, ... 우리가 오직 배워서만 익힐 수 있다”는 생각이 릴케에게 이미 진작부터 각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Lieben lernen”는 것은 “시각(視覺)의 획득 sehen lernen”과 함께 말테-릴케의 삶과 예술에 임하는 근본 자세이며 존재방식 그 자체였다. 그리고 “바르게 사랑할 줄 아는 lieben können” 경지에 이르고자 함은 릴케의 온 삶을 동반했던 숙원이었다. 그래서 촉구되는 것이 참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위대한 사랑하는 여인들 die große Liebenden”을 모범으로 삼아 그들처럼 사랑을 “생산적으로, 보람있게 fruchtbar”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Ⅳ.

1911년, 12년 사이의 겨울에 두이노성(城)에서 완성된, 가히 릴케 중기문학의 결산이라 할 수 있는, 제1, 2비가에는 그 무렵 그를 사로잡고 있던 사랑과 성性Sexus의 주제가 긴 부분을 차지하며 빼어난 비유적 언어 속에 담긴다. 성(性), 즉 관능적 사랑은 디오니소스적인 황홀감의 순간들을 체험케 하면서 “애무의 손길 아래 ... 순수한 지속”(2. E. SWI. 691)을, “사라지지 않는 장소”(Ebd.)와 “포옹 속의 영원”을 약속해 주는 듯하다(Ebd.).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은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으며 환멸만이 남을 뿐이다(Ebd. V. 63, 65). 이처럼 제 2비가 속에서 깊은 회의 속에 부각되는 “그릇된 사랑 falsche Liebe”(Requiem für eine Freundin, SWI. 654)의 실체, 그 무상함과 그에 따른 “절도와 자제 drucklos”(V. 69)의 당부와 함께, 제1 비가에서는 바람직한 사랑의 방식이 제시된다. 사랑의 고통을 생산적으로 승화시켜 평범하였을 그들의 삶을 “더 하게”, “보람 있게”했던 저 “위대한 사랑하는 여인들”의 사랑의 방식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화살의 상으로 비유되는 자기초월이 그것이다.

하여 그리움이 북받치거든 사랑의 여인들을 노래하라, 오래도록
아직 그들의 유명한 감정이 미처 충분히 不滅이 못되고 있음이니.
저들, 그대가 거의 질투를 느끼는 배신당한 여인들, 그대가
충족된 여인들보다 훨씬 더 사랑 많은 이들로 생각했던 여인들을.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라, 결코 다 함이 없을 찬미를.  
생각하라, 영웅은 계속 존속해간다는 것을, 몰락마저도 그에게는
존재키 위한 구실에 불과했음을, 최후의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탈진한 대자연은 이 사랑하는 여인들을
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이 일을 해내기 위해
두 번 다시 쓸 기력이 없다는 듯이. 그대는 가스파라 스탐파 여인을
충분히 기억해 보았는가,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어느 처녀가 이 사랑하는 여인의 승화된 본보기에서
나도 그분처럼 되었으면 하고 느낄 것을?
마침내 이 가장 오랜 고통이 우리에게
보다 보람 있게 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때가 되지 않았는가,
화살이 힘을 모았다가 飛翔할 때 저보다 더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시위를 견뎌내듯, 우리가 사랑하면서도 연인으로부터 벗어나 떨며
그 일을 견뎌내야 할 때가. 왜냐하면 머무름이란 어디에도 없으므로.

Sehnt es dich aber, so singe die Liebenden; lange
noch nicht unsterblich genug ist ihr berühmtes Gefühl.
Jene, du neidest sie fast, Verlassenen, die du
so viel liebender fandst als die Gestillten. Beginn
immer von neuem die nie zu erreichende Preisung;
denk : es erhält sich der Held, selbst der Untergang war ihm
nur ein Vorwand, zu sein: seine letzte Geburt.
Aber die Liebenden nimmt die erschöpfte Natur
in sich zurück, als wären nicht zweimal die Kräfte,
dieses zu leisten. Hast du Gaspara Stampa
denn genügend gedacht, daß irgend ein Mädchen,
dem der Geliebte entging, am gesteigerten Beispiel
dieser Liebenden fühlt : daß ich würde wie sie ?
sollen nicht endlich uns diese ältesten Schmerzen
fruchtbarer werden? Ist es nicht Zeit, daß wir liebend
uns von Geliebten befrein und es bebend bestehn:
wie der Pfeil die Sehne besteht, um gesammelt im Absprung
mehr zu sein als er selbst. Denn Bleiben ist nirgends. (SWI. 686f.)

사랑에 충족된 사람die(der) Gestillte은 사랑하기를 그친다. 갈증을 풀고 난 사람 die(der) Gestillte에게서 갈증이 가시듯이. 이 무렵 릴케를 지배하고 있던  사랑에 대한 관념에 따르면, 사랑에는 실제로 행복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오직 불행을 전제로 한 행복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충족되지 못함 속에 비로소 충족된다는 것이다.

여기 사랑의 아픔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현존재를 획득한 “위대한 사랑하는 여인들”의 한 표본으로 거명되는 가스파라 스탐파(1523-1554)는 16세기 파두아 지방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서 활약했던 여류시인으로 앞서 언급했던 포르투갈의 수녀 마리아나 알코포라도와 함께 충족되지 못한 사랑의 고통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킨 여인이다. “그들의 고통을 쓰디쓰고 시리디 시린 영광으로 전환될 때까지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이들 위대한 여인들이 몸소 실현한 사랑의 방식을 시인은 화살의 飛翔에 비유한다.

화살은 고속으로 팽창된 활시위의 타격에 부러지지 않으면서 부들부들 떨며 확고하게 버티고 “서서steht”있을 뿐만 아니라 활시위를 “견뎌내며 서있다besteht.” 그렇게 견뎌냄으로써 화살은 그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화살의 비상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온 힘을 집중하여 목표를 향해 치닫는 그 쾌속의 비상 속에 자신을 초월하여 바깥의 “열린 곳”으로 진입하며, 이때 화살은 머물러 있을 때보다 “더하게”, “보다 보람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들은 “수세기 동안 온 사랑을 성취하였고 ... 끝없는 고통의 짓눌림 속에서”(SWVI. 832, MLB), 연인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그들의 시와 서간문 속에 그들 자신의 그리움뿐만 아니라, 온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자기초월Selbst-Transzendierung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초월을 통해 그들은 현재까지도 “승화된 본보기”로서 계속 작용하는 위대성을 획득했던 것이다(47-50행). 이러한 자기초월이 화살이 비상하는 상(像)으로 표현되면서 이제 우리는 화살의 존재방식을 배워 스스로 초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인간존재의 본질이 제시된다.

... 왜냐하면 머무름이란 어디에도 없으므로.  (53행)

인간은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목표를 향해 도약할 때만 그 자신의 존재를 충족시킨다. 화살이 어느 목표를 향해 비상하기 위해 활시위로부터 벗어나야 하듯, 인간도 상대방으로부터 놓여날 때 화살이 시위 줄에서 힘을 받듯 연인으로부터 “덤으로 받은 힘”으로 현재의 상태로부터, 그리고 근접한 것을 뛰어넘어 초월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구체적인 인간과의 결합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에게만 향하는 사랑을 무한대의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존재한다. 릴케가 사랑에서 궁극적으로 바랬던 바는 그것이 “현존재의 보다 확장된 우주공간으로 진입하는 창문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한대로 향해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인간은 “대지의 거대한 부름 riesige Ruf ... vom Boden”(1. E. SWI. 687)에 감응할 수 있으며 “거의 모든 사물로부터 그의 감정으로 눈짓하여 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모든 것과의 “연관 Bezug”이 맺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 세계전체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제1비가가 쓰여진지 2년 반 후인 1914년 6월에 나온 일명 “세계내면공간”의 시라고도 하는,「거의 모든 사물로부터 감정이 눈짓하여 오고...Es winkt zu Fühlung fast aus allen Dingen...」로 시작되는 이 시의 마지막 2행에 사랑은 그 무렵 릴케가 지향하는 그 궁극적 의미로서 표현된다.

연인이 된 나, 나에게는
아름다운 피조물의 상이 안주하며 실컷 울어버린다.
Geliebter, der ich wurde : an mir ruht
der schönen Schöpfung Bild und weint sich aus.

어느 특정한 대상에 대한 원근법적인 사랑에서 놓여남으로써 시의 자아, 혹은 시인은온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의 연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피조물의 상”에 대하여 그 완전한 형상화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가  피조물이 자연 속에서 무상의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현존재를 “실컷 울어버릴 수 있는” 안식처를 그의 내면에 마련해줄 수 있다면, 이때 그는 전 피조물의 연인이며 구원자 der Rettende(9. 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글싸지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노파의 유품에서 발견된 글  (0) 2010.01.30
릴케의 존재론적 사랑  (0) 2009.07.21
청승맞은 권태춘씨의 상투적인 일상을 담은 식상한 이야기  (0) 2009.07.14
꽃의 패러디  (0) 2009.05.21
  (0) 2009.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