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싸지르기

릴케의 존재론적 사랑

 

*릴케의 존재론적 사랑*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작품 속에 나타난 사랑과 소유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시 언어의 수많은 의미 형상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릴케의 존재론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릴케의 존재론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존과 관계되는 릴케의 고유한 세계관이 그의 작품의 개별적인 표현들 속에 함축적으로 상징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릴케의 많은 개별적인 작품들이 상이한 형식과 주제 그리고 상이한 창작 시기를 갖고 있으나, 존재론적 세계관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은 그의 존재론적 세계관이 내포되어 있는 중요한 개념들 중에 하나로서 그의 창작의 근본 토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과 릴케의 고유한 존재론적 세계관의 관계는 ‘소유’라는 개념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 릴케의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릴케의 많은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두이노의 비가
의 한 여성의 형상이 많은 해석자들에 의해서 분석되는 과정에서 릴케의 본질적인 사랑이 ‘대상없는 사랑 gegentandlose Liebe’이나 ‘소유하지 않는 사랑 besitzlose Liebe’ 등과 같은 표현으로 귀착되어 표현되고, 또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성숙한 사랑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해석자들의 표현은 자체적으로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릴케의 ‘보다 인간적인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비탄에 잠긴 자이면서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에 도달한 여성의 형상을 관찰함으로써 대답되어질 수 있다. 릴케는 여성들 속에서 삶은 보다 더 직접적이고, 보다 더 풍성하고, 보다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바로 근원적으로 보다 더 성숙한 인간 유형으로 간주하며 남성들 보다 더 인간적인 사람들로 간주한다. 릴케는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고통과 비하 속에서 견디어 낸 이런 여성들의 인간다움은 분명해진다고 본다. 여성들이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수행하는 사랑은 보다 인간적인 사랑인 것이다. ‘보다 인간적인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 보호하고 경계 지우는데 그 본질이 있는 사랑과 유사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삶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의 내면에서 다른 것, 즉 그들의 실존을 위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된다. 이 새로운 것이 바로 앞으로 살펴볼 진정한 의미의 소유와 관계가 있다.

 

  릴케는 인간의 소유와 관련하여 인간을 이용한다는 것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며, 있을 수도 없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 ‘보다 인간적인 사랑’인 것처럼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란 표현을 물리적 대상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할 수 있다. 릴케에게서 소유의 개념은 사물이나 사람과 같은 물리적인 대상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소유의 개념은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유발되는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관련하여 고려되어져야 한다. 사랑의 대상이 떠났다면 사랑하는 이의 삶의 무게가 더욱 커질 수 있으며 이 무게가 크면 클수록 사랑하는 이의 내면에서 잉태되어질 무엇인가 새로운 것, 즉 사랑하는 자의 실존을 위한 것은 더욱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유의 대상인 것이다.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전제로 하지만 이 대상의 소유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우리가 대상을 소유할 수 없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소유할 수 있는가? 연인은 사랑의 방향이며 동시에 사랑의 대상이다. 반면에 소유의 대상은 사랑을 통해서 얻게 되는, 대상에 대한 성숙한 의식이며 동시에 이것을 통해서 획득되는 성숙한 자의식이다. 사랑스런 대상과의 만남, 즉 사랑은 우리 모두 배워야만 하는 일종의 능동적인 작업이다. 우리가 사랑을 통해서, 즉 일을 통해서 얻은 소유는 그러나 영원하지 않다. 이것은 소유한 것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소멸은 새로운 소유를 위한 가능성이다. 어린아이가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만났던 모든 것을 간직하듯이 우리는 잃어버리고 얻으면서 소유를 유지한다. 우리가 체험한 것은 새로운 체험을 위한 토대가 되며, 이 토대 위에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체험을 한다. 즉 이것은 곧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체험이고 이 체험은 보다 더 높은 존재의 단계를 체험하기 위한 밑거름인 것이다.

 

  릴케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 여부가 문제가 아니며, 사랑하는 자가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릴케의 사랑은 소유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항상 보다 높은 존재의 단계로서 새로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소유이며, 현실적인 소유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다 새로운 것을 소유하려는 사랑이 바로 ‘보다 인간적인 사랑’일 것이다.



출처 - 누군가가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