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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행복지수


경제성장이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2차대전 이후 1인당 GDP는 지속적으로 늘어났지만, 국민들의 행복감은 변화가 없거나 때론 줄어들기까지 했다는 것이 1970년대 이미 풍요사회에 진입한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의 발견이다.

같은 시기 영국의 경제학자 허쉬는 ‘성장의 사회적 한계’라는 저서에서 ‘풍요의 역설’이라는 가설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수량을 늘려도 질 저하가 없는 ‘물질재화’와 수량이 늘면 질이 낮아지는 ‘지위재’(positional goods)를 구분해야 하는데, 경제성장의 초반기에는 기본적 의식주를 구성하는 물질경제의 확대가 주를 이루므로 만족감이 늘어나지만, 성장이 진전될수록 교육이나 주거, 환경, 교통 등과 같은 지위재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어 오히려 불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1인당 GDP 2만 달러에 도달한 한국사회도 이미 ‘성장의 역설’을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다.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세계 최장 노동시간이 자리 잡고 있고, 그 결과 이룬 물질적 풍요 위에서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나타나고 있다. 90%에 근접한 대학진학률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경쟁은 더욱 살인적으로 치열해졌다. 영업이익 20조 기업이 나오는 호황 속에 오히려 청년실업은 더 심각해지고, 비정규직 고용은 훨씬 더 많아졌다. 주택보급률은 110%에 달했지만, 내 집 마련에 걸리는 시간은 어느 때보다 더 길어졌다.

이 모든 난제들은 성장으로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지위 경쟁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나의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의 소비, 즉 사회적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부탄의 왕추크 국왕은 이미 1972년에 GDP 대신에 국민총행복(GNH)의 증진을 발전의 기준으로 삼아 히말라야의 자연미와 불교적 영성이 가득한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1인당 GDP가 1800달러에 인구 60만에 불과한 산악 국가는 예외라고 치자.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2007년 집권 후 ‘경제성취와 사회발전 측정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와 센 등을 위촉하여 GDP 개념을 삶의 질과 지속가능성의 기준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올해 발표한 결과보고서는 12개의 주요 권고안을 담고 있다.

영국의 캐머런 총리도 최근 GDP를 대신할 일반웰빙지수(GWB)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행복은 돈으로 측정될 수 없고 시장에서 살 수도 없는, 환경과 문화, 그리고 돈독한 사회관계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보수 정치인들까지 ‘국민의 행복감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라고 인식한 배경에는 ‘GDP를 넘어서’ 새로운 발전지표를 만들고자 노력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국의 지난 10여년간의 노력이 깔려 있다.

정작 이러한 노력을 집약한 2009년 부산 OECD 월드포럼의 개막식에서 행복지수 개발을 약속한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는 “대한민국은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실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하고 있다”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개발해 경제는 물론 국민의 행복도를 꼼꼼하게 챙겨나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1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약속한 ‘삶의 질 지표’는 보이지 않는다. 기본 통계가 부실한 현실과 예상되는 낮은 성적표에 부담감을 갖는 관료사회의 거부감도 원인일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747 대선공약으로 대표되는 GDP 중심의 ‘양적 성장’에서 사회통합과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중도실용’으로 패러다임 전환의 방향은 잡았으나, 이를 구현할 일관된 철학과 실행력을 갖추지 못한 정부의 한계로 읽힌다. 졸속으로 지표를 만드는 것은 문제다. 그러나 지표작성의 원칙에 대한 토론조차 미루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지향하는 사회를 구체화할 지표 없이는 구체적인 정책 목표 설정도, 향후 평가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민일보(이재열/서울대 교수. 사회학)>